봉숭아, 설레임으로 피어 기다림으로 지는…

2008. 4. 2. 17:03포토에세이-사진기행

 봉숭아, 설레임으로 피어 기다림으로 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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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담긴 꽃물

“언니야! 창희 먼저 해도. 이쪽 검지부터….”

봉숭아물을 들인다 하여 절구를 갖다 대자 대청마루에 벌렁 누워 “나 안빠아∼ 못빠아∼”라며 어리광부리던 아이는 봉숭아가 다 빻아지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 씩 웃으며  언니에게 손가락을 가져다댄다.

8월초 경남 거창에서 농사짓는 임오근 씨 댁. 원색적인 여름의 향기가 그윽할 즈음 첫째딸 경란이와 둘째딸 창희 그리고 경란이 친구 봄희의 봉숭아물 들이기가 시작됐다.

“그래 이리 온나! 니부터 먼저 들여 줄께.”

창희보다 4살 위인 언니 경란이는 어느새 봉숭아 꽃잎과 이파리를 백반과 잘 섞어 재료를 준비한 후 창희의 손에 꽃물을 들이기 시작한다. 봉숭아물을 들이자는 전화에 3분도 채 안되어 바로 달려온 경란이의 친구 봄희도 옆에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완두콩보다 작은 창희의 손톱 위에 놓인 붉은 꽃즙이 실로 동동 감아 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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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 손가락 다 해도. 그게 이쁘지 않나?”

“뭐가 그게 이쁘노? 촌스럽지. 할매가 보면 쥐잡아먹었다 하겠다.”

“언니야! 손가락에서 심장 뛰는 게 느껴진다. 너무 꽉 맨 거 같다.”

“니는 꽉 매야 된다. 전에도 손가락에서 빠져가 이불이 빨갛게 물들지 않았나?”

아이들은 그 짧은 시간에도 쉬지 않고 조잘거리며 봉숭아물을 들인다.

“내도 어렸을 때 봉숭아물 많이 들였데이. 옆집 사는 친구 분희랑 마당 앞에서 봉숭아 따다가 말이다. 그땐 백반이 어디 있었나? 소금 섞어서 이파리에 동동 묶어서 많이 들였제”라고 말하는 창희의 어머니.

쑥스러워서인지 딸들이 봉숭아물 한 번 들여 보라는 말에 고개를 젓는다. 대신 그윽한 눈으로 소꿉장난하는 듯한 아이들의 봉숭아물 들이기를 바라만 본다.

“아저씨도 한번 들여 볼래요?”라고 물어보는 창희.

‘어쩔까’ 망설이고 있을 때 “아저씨는 사진 찍어야 되니깐 안된다”는 영란이의 말에  입맛만 ‘쩝’ 다셔야했다.

어디 어릴 적 봉숭아물 들이지 않은 사람 있으랴만 촌에 사는 아이들은 봉숭아에 대한 추억이 남다르다. 

“작년에 첫 눈 올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안 이루어지더라고요”라고 말하는 아이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말을 또 믿으며 ‘제발 첫눈 올 때까지 남아있어라’하며 어느 남학생을 생각하며 소원을 빌었을지도….

아이들의 소망을 담은 꽃물은 그렇게 아이들의 손톱 위에서 기다림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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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밑에선 봉선화

봉숭아물 들이는 풍습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풍습인 듯 싶다. 전설까지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백제(혹은 고려) 때 한 여인이 선녀로부터 봉황을 받는 꿈을 꾸고 딸을 낳아 봉선이라 이름지었다. 봉선이는 가야금 타는 실력이 뛰어나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됐고 마침내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가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궁궐 안에서 연주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봉선은 병을 얻게 되고 집에 몸져 누워있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임금님 행차가 집 앞을 지난다는 소리를 들은 봉선이는 사력을 다해 일어나 가야금을 켰다. 그 소리가 어찌나 아름답고도 슬프던지 임금님은 금세 봉선이의 가야금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봉선이의 집을 찾게 되었다. 봉선이의 손은 이미 붉은 피가 맺혀 있었고 임금은 이를 가엽게 여겨 명반을 무명천에 싸서 봉선의 손을 감싸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봉선은 이미 몸이 너무 약해있었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은 죽었다고 한다. 봉선이를 묻은 자리에는 붉은색 꽃이 피어났는데 사람들은 이 꽃을 ‘봉선화’라 부르며 손톱에 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봉선화 꽃물 들이는 사연은 바로 거기서부터 비롯됐다.

봉선화라고도 불리는 봉숭아는 예로부터 처녀아이들과 아낙들의 빼놓을 수 없는 미용도구뿐만 아니라 붉은 색이 못된 귀신이나 질병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믿음 때문에 부적과 같은 역할을 했다. 때문에 장독대 옆이나 담장 밑에 봉숭아를 심어놓기도 하였고 예전에는 남자들도 많이 들였다고 한다. 실제로 이 꽃은 뱀이 싫어하는 냄새가 나 뱀이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금사화(禁蛇花)’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설부터 시작하여 누이의 손 밑에서, 어머니의 장독대  밑에서 아버지가 쳐놓은 울밑에서 자라는 봉숭아.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라고 시작되는 노랫말을 보더라도 봉숭아가 암울했던 일제시기에도 우리 곁에 늘 함께 하면서 언젠가 올 해방의 날을 함께 꾸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봉숭아는 비록 약하게는 생겼지만 웬만한 환경에 적응하며 서리가 내릴 때까지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니 꼭 우리네 사람들을 닮지 않았는가.

봉숭아에는 애절한 사연이 또 하나 있다. 6·25때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룬 부산에서 의술을 넘어 인술을 펼치는데 평생을 바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을 너무도 사랑해 재혼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 그는 북에 두고 온 아내와 50년 동안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채 맺힌 한(恨)을 풀지 못하고 끝내 숨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그 긴긴 별리의 시간 동안 북의 아내가 불러준 〈봉선화〉 노래 테이프를 들으며 그리움을 삭이며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장기려 박사에게 봉숭아는 너무나 절박한 그리움에 다름 아니며 아내를 기다리는 마음의 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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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수로 잘 들었네”

“언니야! 이쪽 손가락에 낀 거 벌써 밤에 빠져버렸다.”

시골 아이들답게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와 같이 아침준비를 하는 경란이. 옆에서 쉴새없이 조잘거리는 창희. 이내 기자도 아이들 조잘거림과 강아지 짖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느새 어제 왔던 봄희와 이 집 두 아이들은 모두 봉숭아물이 얼마나 잘 들었나를 확인하기 위해 도란도란 모여 앉았다.

 “우와 억수로 잘 들었네. 아주 빨갛게 잘 들었다”라며 만족한 표정으로 흐뭇한 웃음을 함박 머금고 있는 아이들. 아이들의 손가락은 아직 쭈글쭈글 했지만 손톱 위에는 여름빛을 담은 도장이 찍혀있었다. 요즘에는 문방구에서도 더 빨리 찐하게 색을 들일 수 있는 ‘봉숭아물’을 몇 백 원이면 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아이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의 감상법을 배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다림으로 물들이는 시간의 감상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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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희네 집에서 나와 터미널로 향하는 길에서 본 어느 집 담 밑에 핀 봉숭아. 

후후∼, 아이들은 올해 첫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아이들이 봉숭아물 들이라 할 때 빨리 들인다고 할 걸 했나 하는 후회가 든다.

그래야 장기려 박사와 봉숭아가 가르쳐 준 ‘기다림’을 아이 같은 설렘으로 맞을 수 있었을 텐데. 

포슬포슬 내릴 첫눈과 함께….

 

 

 

사진 글  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