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4. 2. 17:33ㆍ포토에세이-사진기행
녹두장군이 생의 마지막 한 자락에서 찾은 술,
죽력고(竹瀝膏)
“형,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있겠어요? 취해서 사진이 다 흔들리는 거 아니에요?”
날씨도 쌀쌀해지고 밤도 깊어지니 이번 사진기행은 전통술을 찾아가기로 했다는 말에 한 후배 사진기자가 대뜸 던진 말이다. 잘 마시지는 못해도 남 못지 않게(?) 술을 즐기는 필자로선 아닌 게 아니라 양조장에서 갓 담근 질 좋은 술을 그 자리에서 먹어보는 기회가 오니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조선의 3대 명주 중 하나라는 ‘죽력고’를 찾아 나서는 길인데….
사진/글 유수
약인가 술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찾은 ‘태인양조장’.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서 40년 넘었다는 태인양조장은 그 세월만큼 낡은 2층짜리 건물의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그 앞의 수십 개 장독이 오랜 양조장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했다. 마침 양조장 주인 송명섭(48)씨는 40kg짜리 쌀가마를 등에 이고 2층에 오르고 있었다. 밑술을 만들기 위한 고들밥을 준비중이다.
‘휴∼’ 큰 숨으로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 말을 꺼내는 송명섭 씨.
“찹쌀을 써야 술이 찰지고 더 감칠맛이 나요. 술은 재료가 중요한데 어떤 곡식과 어떤 물로 만드느냐가 술맛을 결정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웬간하면 찹쌀로 술을 담가요.”
작년에 찹쌀 80kg짜리 한 가마가 40만 원이었는데 올해는 16만 원으로 내려 다행이라는 송씨는 “우리나라만큼 물을 마시며 다양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드물 거예요. 물이 ‘청아하다’는 둥, ‘달다’는 둥, 거칠다’는 둥 수많은 표현이 있잖아요. 그만큼 물맛에 예민한 거죠. 물이 그 정도이면 술은 어떻겠어요?”라고 되묻는다.
송 씨를 따라 집안에 들어서면서 기자는 내심 ‘드디어 죽력고를 한번 먹어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잔뜩 했다. 그러나 송명섭 씨는 진달래차를 한 잔 내오더니 “죽력고는 전봉준 장군이 일본군에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면서 죽기 전에 한번 맛을 보고 싶다던 술입니다. 아마 전봉준장군은 관군에게 온 몸을 두들겨 맞고 나서 어혈을 풀기 위해 죽력고를 달라고 한 거 같아요”라며 죽력고에 대한 얘기만 술술 풀어놓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죽력고는 약으로도 쓰이는 술인데, 예전에는 애들 경기를 일으키면 청심환처럼 먹였다고 한다. 고혈압이나 풍에도 효능이 있다고 하는데 혈이 막혀 장애가 오면 대나무로 유명한 전라도 지역에서는 죽력고를 약으로 썼다고 한다. 전라도에서 태어나 태인 일대에서 지낸 전봉준 장군은 이런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던 모양이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순창에서 관군에게 잡혀 뭇매를 맞고 일본군에게 넘겨진 전봉준 장군. 그는 죽력고 한 잔으로 자신의 상처 난 몸을 추스르고 끝까지 저항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전봉준 장군은 죽기 전까지 당당한 모습으로 벼슬아치들을 꾸짖었다고 한다.
밀주단속이 심했던 일제 식민지 시기 송명섭 씨는 어떻게 죽력고를 전수 받을 수 있었을까? 그 뿌리는 그의 외조부로부터 찾을 수 있다. 한약방을 하였다던 그의 외조부는 정부의 밀주단속을 피해 약으로도 쓰인 죽력고를 전해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죽력고는 고스란히 딸에게 전수된다. 양조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밀주단속을 피해 비교적 쉽게 술을 담가먹을 수 있었던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중풍에 걸려 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죽력고를 담가 병 수발을 했다. 송명섭 씨도 아버지가 병을 얻자 자연스럽게 술 만드는 양조장 일을 시작하며 죽력고 담그는 법을 배운 것이다.
“아버지 병 수발을 들면서 아들이랍시고 있던 차에 술 담그는 걸 배웠죠. 솔직히 말해서 공부하는 것보다 술만 드는 게 훨씬 재미있더라고요. 그때 죽력고 만들던 게 오늘까지 왔네요.”
“술은 하나의 생명체며 음식이라 배웠어요”
두 시간의 긴 저녁식사 동안 죽력고 얘기를 들은 후 기대하고 고대했던 죽력고를 마실 수 있었다. 원래 술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선주후면’이라고 식사 전에 술맛을 봐야하나 주인장은 기자의 몸을 생각해서인지 식사가 끝나서야 죽력고를 내왔던 것이다.
짙누런 빛깔의 술을 양조장에서 갓 퍼 올려 작은 주전자에는 대나무향이 그야말로 ‘그윽했다’. 첫 잔을 입에 대자 혀끝으로부터 부드럽게 넘어간다. 마침 송명섭 씨는 “몇 도나 될 것 같으냐”고 묻는다.
“한 35도 정도 될 것 같은데….”
첫 잔을 마신 지 몇 초나 지났을까?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
“헉, 족히 45도는 넘을 것 같은데요.”
그도 죽력고가 정확히 몇 도인지 모르나 소주꼬리에서 증류되어 처음 나오는 술이 가장 독한 술이란다.
“저는 어머니에게 술은 하나의 생명체며 음식이라 배웠어요. 우선 만드는 재료부터 곡물로 만들잖아요. 곡물 일곱 되를 넣으면 술 한 되가 나옵니다. 그만큼 귀한 음식인 거지요. 그리고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음식이 안 되듯이 술도 사람의 손끝에서 만드는 마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30년째 술을 담그고 있지만 정성을 안 들이면 아무 맛도 없는 독약이 되는 거지요. 하지만 술을 담을 때 술에게 부탁을 하듯 정성을 담으면 술에서 향이 나고 맛도 있어져요.”
그의 말을 들으며 주거니 권커니 어느새 여섯 잔이나 비웠다. 양만 놓고 본다면 벌써 소주 두 병은 먹은 셈이다. 하지만 아직 정신은 말짱하다. 어설프게 취해서 일까? 술을 더 먹고 싶은 요량에 슬쩍 술도가집 주인인 송명섭 씨에게 주량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송명섭 씨는 “사람들이 말하는 주량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술은 음식이기 때문에 술을 과하게 먹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다고 배가 아프고 토할 때까지 먹지는 않잖아요.” 그의 말에 기자는 쩝∼ 입맛만 다셔야했다. 나중에 펼쳐본 취재수첩의 글씨를 보며 기자가 그때 이미 취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네다섯 잔 이후의 일인 모양이다. 그때는 안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오래 술을 만들어온 주인장의 내공에 눈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리라.
활활 타오르는 콩대에 어느새 죽력은 내려앉고
죽력고의 죽력이란 대나무액을 말한다. 대나무를 불에 달구면 액이 떨어지는데 이 액이 죽력이다. ‘고’가 붙은 것은 술을 세 번 빚었다는 고급술 ‘춘(春)’을 다시 약재를 넣어 담근 술이라는 의미다. 죽력이라는 약재에 ‘춘’을 섞어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술이 바로 죽력고인 셈이다.
이 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죽력을 만들기 위해서 이른 아침 송명섭 씨는 정미소에 들려 왕겨를 구한 뒤 대밭에서 대나무를 자른다. 이 대나무를 다시 잘게 잘라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어 땅에 자배기만 묻은 후 콩대로 불을 지피고 왕겨를 덮어 사흘정도 지나면 그 열에 의해 죽력이 내려앉는다. 마른 콩대는 활활 타올라 그의 키에 닿을 정도로 불길이 솟았다. 하루 종일 고생해서인지 콩대에 불을 지필 무렵 그의 이마에는 가을바람이 차가운데도 땀이 송송하다.
어느새 가을빛 누런 들판에 해가 너울너울 넘어가기 시작한다. 언제나 올 때마다 기분 좋아지는 호남평야와 10월의 구수한 벼 익는 냄새가 가을노을을 만난 것이다. 그 위에 너울너울 타오르는 마른 콩대의 불길. 농민항쟁의 시작이 된 호남평야와 녹두장군이 죽기 전 끝까지 저항하기 위해 마신 죽력고를 생각하며 묘한 상념에 젖어든다.
어느덧 다시 죽력고 생각이 간절해지는 이유는 뭘까.
위 사진과 글은 월간 민족21 2004년 11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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