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방울이 빚은 참물 쪽빛

2008. 4. 2. 16:50포토에세이-사진기행

 

땀방울이 빚은
                    참물 쪽빛







 

우리는 청명하고 아름다운 푸른 빛깔을 내는 하늘과 바다를 흔히 ‘쪽빛’이라 표현한다.

올해도 여전히 그 쪽빛은 푸른 하늘이 되어 우리 옆에 다가왔다.

왜 이 쪽빛만 보면 가슴이 그토록 설레이는지….

하지만 한때 그 쪽빛을 우리도 모르게 버렸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까? 하늘을 닮고 우리의 마음을 닮았다는 쪽빛을 한결같이 지켜온 사람이 있다기에 전남 나주를 찾았다.


사진 글 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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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 정관채

나주 터미널에서 5분쯤 더 가서 내린 영산강삼거리. 여름은 어느새 시들고 강가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상쾌함을 더해줬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유혹을 던지던 쪽빛하늘은 서울서부터 따라와 지켰는지 구름때가 좀 끼었지만 여전히 그 푸른 빛깔을 잃지 않고 있었다.

“저, 혹시 민족21…, 아! 반갑습니다. 정관채입니다.”

쪽빛 생활한복을 입은 중년의 선생이 카메라 가방을 보고 쉽게 기자를 알아본 모양이다.

‘설마…, 이 분이 정관채 선생님?’

중요무형문화재라 하여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는 아니어도 이렇듯 40대 중년의 장인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처음 마주 앉아 우연히 본 그의 손끝은 푸르게 물들어 있었고 그가 쪽빛과 함께 한 세월이 만만치 않음을 말해주었다.

영산강변을 따라 차는 시원스럽게 달렸고 몇 분이 채 안되어서 선생의 공방에 도착하였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 공방 한켠에서 10여 개의 장독대가 쪽향을 뿜어내고 있다. 빨래처럼 주렁주렁 널린 쪽빛 천이 푸른 하늘과 조화를 이루어 선생의 공방은 누가 보아도 염색장이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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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청년의 꿈

“사람들은 그때 내가 하는 일을 잘 이해 못했을 겁니다. 다들 거들떠도 안 보는 일이었으니까요.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그래도 어쩌겠어요? 샛골에서 태어나 미술을 배운 나마저 여기서 포기한다면 쪽빛은 영영 끝날 것만 같았으니까요.”

영산강이 가로지르는 나주는 예로부터 쪽염색으로 유명하였다. 아흔 아홉 구비라는 영산강변은 땅은 비옥하나 큰 비가 오면 범람이 잦아 곡식을 키우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그래서 습기에 강한 ‘쪽’이라는 식물을 키웠고 쪽염색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중 쪽염색으로 가장 유명했던 곳이 샛골. 정관채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생의 절반 이상을 쪽염색에 바친 염색장이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쪽염을 하겠다고 나선 1970년대에 쪽빛은 이미 우리 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구한말부터 합성염료가 수입돼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쪽염색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1978년 그가 미술학도로서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쪽의 종자조차 구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인공염료가 처음 들어왔을 때 이를 깡물이라 하여 천한물로 불렀고 전통염색을 참물이라 하여 귀히 여겼으나 어느새 편리함을 이유로 깡물이 참물을 잡아먹었던 것이다. 선생은 어렵사리 쪽씨를 구해 샛골에 다시 뿌리고 손의 푸른 기가 빠질 날 없이 쪽물을 만지며 우리의 쪽빛을 되살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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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밭에서 일하시다가

“자! 이리로 오십시오. 여기가 쪽염료를 숙성시키는 곳입니다”라며 한지 바른 문창살을 열고 들어가는 정관채 선생. 9월 초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한낮에 군불을 땐 방은 후끈후끈하였다. 그곳에는 항아리 두 개와 두툼한 쪽이불. 그리고 알 수 없는 사진 하나가 걸려 있었다.

“어머니 사진입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염색을 하려다가도 아침에 누군가 초상집을 다녀간 사람이 다녀가거나 부정 탄 것을 보거나 하면 그날은 일을 안 하셨어요. 물론 주술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이 일이 워낙 장인들의 감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뭔가 찜찜하면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색도 제대로 안 나옵니다. 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왠지 어머니 사진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어머니가 지켜보고 계시니까 왠지 잘 될 것만 같아서요.”

선생의 스승이기도 한 어머니. 어머니는 아들이 하는 일이라기에 아무말 않고 묵묵히 아들에게 쪽물을 전수해 주었다. 어머니는 쪽밭에서 일하시다가 그만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그에게 어머니는 더 애틋할 것이다. 그는 “살아 계셨다면 어머니가 바로 인간문화재가 되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쪽 침전물과 잿물을 섞어 만든 염료를 독에 넣어 고무래로 힘차게 저어주는 정관채 선생은 금세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다. 보고만 있어도 힘들고 더워 보인다.

3월에 쪽씨를 뿌리고 5월에 그것을 다시 옮겨 심는 일부터 시작하여 꽃이 피기 전 쪽을 베어 항아리에 담고 쪽물을 빼는 일. 그리고 잿물을 만드는 일이며 굴 껍질을 가마에 넣어 장작을 때 석회가루를 만드는 일 모두가 쪽빛을 내는데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다. 다른 전통염색법이 매염제를 넣어 색을 내는 반면 쪽빛은 산화와 환원의 미생물의 대사활동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방법 또한 어렵고 까다로울 수밖에. 그래서일까? 예로부터 쪽색은 귀한 물건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규수들이 시집을 갈 때 쪽치마나 쪽이불은 그녀들의 품위를 말하는 필수품이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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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푸른 손끝에서

쪽빛은 장인이 흘린 땀방울만큼 아름다운 빛깔이 되어 그 땀에 보답한다. 쪽빛은 장인의 고된 노동과 땀방울이 빚어내는 빛깔인 셈이다. 쪽빛 물든 무명천이 푸른 하늘 사이에 걸리면 쪽빛은 하늘빛과 구별 안될 정도로 푸르름을 더한다. 보는 사람도 그 빛에 취하는데 정작 이 빛을 만든 장인은 오죽할까? 예로부터 염색장인은 그 맛에 쪽빛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쪽빛을 보고 참물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비록 만들기는 힘들고 고달프나 그 색이 워낙 청명하고 고운 우리만의 하늘빛을 닮아있기에.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한대도 깡물은 이 색을 알 수도, 흉내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 좋은 쪽빛이 왜 한때나마 우리 곁을 떠나야 했을까. 혹시 우리가 깡물의 빠르고 간편함에 젖어 쪽빛을 내는데 없어서는 안 될 기다림과 장인의 땀방울을 소홀히 한 탓이 아닐까?

“쪽빛이 뭔지 압니까? 쪽빛은 일본식으로는 곤색이라고도 말하고 색채학으로는 남색이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말하는 쪽빛은 우리 같은 염색장인들이 1년 내내 잿물 만들고 쪽풀 길러서 그놈을 또 더운 여름 발효시키고 고생해서 만든 색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인의 땀 냄새와 쪽 냄새가 섞인 방안에서 그의 푸른 손끝을 보며 우리네 ‘색’인 쪽빛에 어린 우리네 ‘마음’하나 되찾는다.




위 사진과 글은 월간 민족21 2004년 10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